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전의 형세 == 이미 전 세기에 있었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16세기에 한 차례 큰 분쟁을 겪었다. 당시 황제 [[카를 5세]]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슈말칼덴 전쟁]]을 통해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하고자 하였으나 무리한 개신교 탄압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내부 상속 문제[* 카를 5세는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제위도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뿐만 아니라 가톨릭 및 개신교 제후들의 반발에 봉착하였다.]로 제후들의 신망을 잃었고, 결국 작센-마이센의 [[모리츠(작센)|모리츠]]에게 배신당해 기습공격을 받아 에스파냐로 달아나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형을 대신해 신성 로마 제국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한 [[페르디난트 1세]]는 1555년, 형의 이름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주선했다. 그 결과 일단 [[루터교회|루터파]]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영주 개인의 신앙을 기반으로 영지의 신앙을 결정 짓는 난점이 있었다. 그래도 페르디난트 1세와 그 후계자 [[막시밀리안 2세]]의 균형잡힌 정책[* 페르디난트 1세는 형처럼 가톨릭을 고수했으나 당시 자신의 상속지 중 하나인 [[헝가리 왕국]]을 침공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제후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종교적으로 유화적인 면을 보였으며, 막시밀리안 2세는 젊은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루터파에 호의적인 면을 보였다.]으로 인해 16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그런대로 큰 갈등 없이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가장 중요했던 변화는 [[개혁교회|칼뱅파]]의 득세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어쨌든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협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세력이 미미했던 칼뱅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칼뱅파도 신앙의 자유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문제가 생겼는데 영주가 칼뱅파라면 문제 없이 넘어가겠지만, 가톨릭이라면 그 지역 칼뱅파는 그대로 [[이단]] 확정. 루터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칼뱅파를 곱게 보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루터파 측에선 "칼뱅파의 [[용]]이 그 무시무시한 [[이슬람|무함마드교]]를 잉태했다."는 중상모략까지 할 정도였다.[* 칼뱅파에서 이슬람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니라 칼뱅파가 이슬람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비판에 가깝다. 성화상에 별로 비판적이지 않던 루터파와 비판적이던 칼뱅파의 차이, 그리고 이슬람교의 성화상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자.] 칼뱅파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혼란은 더욱 커져서 칼뱅파 신하가 어린 루터파 영주를 칼뱅파로 몰래 개종시키는 등의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같은 개신교라도 루터파와 칼뱅파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이는 일단 새로 세력을 막 불리려는 두 개신교 종파 간의 싸움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원론적으로 루터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만 거부하지, 종교에 따라 오는 정치-사회적 조직과 구조는 기존의 중앙 집권화를 이룬 절대주의적 모델을 중심으로 성장한 반면, 칼뱅파는 도시민들이나 정치적으로 이 시절 진행 중이었던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반발하는 지역 봉건 영주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당장 루터교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작센 선제후국|작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같은 곳들은 죄다 나라의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중심으로 [[군주]]들이 조직화된 [[관료]] 집단을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을 휘두른 반면, 칼뱅교가 퍼져나간 [[팔츠 선제후국]], [[저지대|네덜란드]], 남프랑스,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 [[라인 강]]변의 [[자유도시]] 등의 지방들은 이런 상업 문화가 발달한 도시들이었거나 [[런던]], [[파리(프랑스)|파리]], [[빈(오스트리아)|빈]] 등 군주들이 거주하는 수도의 권력 팽창에 맞서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펼쳐졌던 지역들이다. 가톨릭 쪽 상황도 그리 좋은 편만은 아니라서 [[압스부르고 왕조|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측은 개신교 쪽에 강경한 입장인 [[예수회]]가 강성했던 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이었던 카푸친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파.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사후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회로 분화되었다.]가 영향력이 있었다. 앙숙인 에스파냐에서 예수회가 대세라서 프랑스에서는 카푸친 작은형제회를 밀어준 것도 있다. 전쟁의 공식적 발단(casus belli)은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쟁의 조짐은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도나우뵈르트 사건'''이다. 인구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인 이 도시는 지리적으로 "내륙시(市)"로 가톨릭인 바이에른 공국에 둘러싸여 있었다. 1606년 4월 25일, 이 도시의 소수 가톨릭이 정부에 예배행렬을 할 것을 요구했고, 예배행렬을 혐오하며 우상숭배 취급하는 개신교 교리상, 시 정부는 거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가톨릭 신자들은 황제의 중재를 요구했고, 가톨릭의 수호자인 황제 [[루돌프 2세]]는 너무 당연하게도 가톨릭 신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루돌프 2세는 도나우뵈르트에게 교황령의 파문과 비슷한 형벌인 제국 추방령을 선고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는 도나우뵈르트를 정벌하여 자신의 영토에 종속시켰다. 이에 충격받은 중부유럽의 개신교 소도시들은, 루터파와 칼뱅파를 불문하고 네덜란드, 잉글랜드, 당시 개신교였던 남프랑스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연대를 설립하였다. 이에 대응해 막시밀리안 1세는 에스파냐, 제국의 가톨릭 제후국들과 협정을 맺고 가톨릭 연대를 창설하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을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